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나오 가즈히사 (문단 편집) == 평가 == 여러모로 한국의 [[최동원]]과 유사점이 많은 투수이다. 야구선수가 되기까지 뒤에서 조언해 준 부친을 뒀으며, 프로에서는 혹사에도 불구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을 냈고, 무쇠팔이란 별명으로 [[한국시리즈]]/[[일본시리즈]]에서 4승을 거두며 각자 소속 팀을 우승시켰다. 또한 정의감도 투철하여, [[검은 안개 사건]] 당시 일각에서 제기된 '요미우리 흑막설' 등을 일축하며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바라는 한편 조사 협조에 미온적이던 구단들을 비판하기도 했다. 14년간 강렬한 기록을 남기고 사라진 한 시대의 대투수. 뛰어난 성적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매력, 인품도 대단해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스타로 성공을 했었어도 절대로 거만하지 않은 성품으로도 명성을 얻었다. 말기 [[암]]으로 [[시한부 인생]]이 된 부친을 위해 연봉을 [[가불]]받아 벳푸의 해안가 전망 좋은 집을 사드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.[* 연봉 가불 협상 때 이나오 부친의 사연을 들은 니시테츠 대표가 이나오의 효심에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흔쾌히 원하는 액수를 내줬다고. 덕분에 이나오 부친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.] 그리고 저 일본 야구에서도 유명했던 괴짜인 [[오치아이 히로미츠]]를 포용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으니 인성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.[* 그의 롯데 감독 해임이 오치아이가 롯데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.] 원래 이나오의 등번호인 24번은 [[오시타 히로시]]의 3번, [[나카니시 후토시]]의 6번과 더불어 니시테츠 시절의 [[영구 결번/스포츠|영구 결번]]이었지만, 니시테츠 라이온스가 다이헤이요(太平洋)로 매각되면서 이나오 자신은 81번을 쓰고 24번은 재능있는 후배선수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. 이후 라이온스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(古賀正明)-[[아키야마 코지]]-히라노 켄(平野謙)-마츠나가 히로노리(松永浩典)로 이어졌다. 2012년 5월 1일, 그의 탄생 75주년을 맞아 선수 시절 등번호인 24번이 세이부 라이온즈의 첫 영구 결번으로 공식으로 지정했다. 세이부는 니시테츠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이번에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 지정했는데 원래 이전 팀의 영구 결번을 잇지 않는 일본 야구의 관례상[* 다만, [[오릭스 버팔로스]]가 [[킨테츠 버팔로즈]]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킨테츠의 영구 결번 선수인 [[스즈키 케이시]]의 영구 결번을 합병 후에도 유지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나, 선수 본인이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된 적이 있다.]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. --호크스 팬들 들고 일어나겠다--[* 그는 사이타마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고 순전히 후쿠오카에서만 뛰었다. 현역 당시 그의 팬덤은 현재 호크스 구역.][* 사족으로 라이온스가 과거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팀이라서 그런지 호크스-라이온스와의 시리즈 중 일부는 올드 유니폼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. 비록 과거에 연고로 하던 팀은 떠났지만, 라이온스의 후쿠오카 시절 역사를 최대한 후쿠오카 팬들에게 돌려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. 이는 호크스도 마찬가지라서 오릭스 원정 때 난카이 유니폼을 입고 오사카 시리즈를 하기도 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